[츠무나츠] 콧쿠리 씨, 부디 이리로.

    ※ 해당 글은 '밀고 당기는◆원더게임' 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 사망 및 사별 소재가 등장하며 유혈, 사고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 강령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를 통해 이야기가 진행되며 관련 단어를 사용하므로 자세히 알고 글을 읽으시길 권장합니다. 여기를 참고해주세요.


    星が散ル

    별이 진다.

    やがて寂しい闇がひたひたと押し寄せル

    이윽고 쓸쓸한 어둠이 물밀듯이 몰려온다.

    ボクは虚しさを両目にいっぱい盛っテ、

    나는 허무함을 두 눈에 가득히 담고,

    たダ、何もない向こうを眺めるだけダ

    그저, 아무것도 없는 저편을 바라볼 뿐이다.

     

     

     

     

    * 콧쿠리상 : 종이와 동전을 이용해 여럿이서 시행하는 일본의 강령술. 특수한 오십음도표 위에 동전을 올려놓고, 그 위에 손을 얹은 채 주문을 외워 령을 불러낸다. 주로 여우 등의 동물령을 부르기에 「狐狗狸(こっくり, 콧쿠리, 각각 여우, 개, 너구리를 뜻하는 한자를 묶어놓은 것)さん」이라 쓴다. 불러낸 령에게 질문을 하면 동전이 종이에 그려진 오십음도표를 오가며 한 문자씩 대답해 문장을 완성하는 방식. 위험성은 낮다고 알려져 있지만, 절대 혼자 시행하면 안되며 불러낸 령의 허락 없이 중간에 멈출 수 없다. , 콧쿠리상의 정체를 묻는 행위 또한 금기시되어 있다.

     

     

     

     

     

    나츠메는 아침부터 불쾌한 꿈을 꿨다. 제게 있어 가장 끔찍한 일을 겪고 일 년, 이따금씩 꾸곤 하는 꿈이었다. 아스팔트를 긁는 끔찍한 비명같은 고무의 마찰음, 사이렌소리, 체온이라기엔 지나치게 따뜻한 온기, 웃는 얼굴, 떠올릴 수록 사건만은 선명하지만 그 일체의 풍경은 흐릿한 꿈. 모처럼 성주관에서 머무르던 나즈나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그를 꼭두새벽부터 깨우지 않았더라면, 오늘도 나츠메는 그 광경을 끝까지 바라보다 눈물범벅으로 눈을 떴을 터였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간신히 눈을 뜬 나츠메는 저를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나즈나와 레오의 얼굴을 보고 우선 안도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절망했다. 아, 꿈이구나. 꿈이었구나. 돌아오지 않는 현실감을 간신히 부여잡자 저 멀리서 들리는 듯하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나츠메찡, 괜찮아? 땀투성이잖아. 한눈에 봐도 걱정이 어린 말투였다. 나츠메는 대답 대신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목에 힘을 줘 목소리를 낼 여력조차 없었다. 일어난 그가 얼굴을 감싸 쥐고 마른세수를 하자 곁에 있던 두 사람이 다시 말을 걸었다. 한참 힘들어하는 소리에 놀라서 왔더니 그가 굉장히 괴로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나즈나의 걱정이라던가, 그를 깨우던 나즈나의 목소리에 자기마저 잠이 깼다는 레오의 투정이라던가, 그런 말들을 대충 걸러 들으며 나츠메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카랑카랑하게 그의 귓가를 때린 레오의 한마디에 기껏 차린 정신은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그런데, '오빠'는 누굴 말하는 거야? 자는 내내 애타게 부르던걸!

    나츠메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오를 조금 넘기자 바깥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구름도 없었고, 비 소식도 없었으니 아마 이 시기 이따금 내리던 여우비인 듯했다. 이른 아침부터 도망치듯 성주관 공용 스페이스에 나와 있던 나츠메는 빗소리에 읽던 잡지를 내려놓고 밖을 바라보았다. 통창 사이로 보이는 정원이 옅은 비에 젖어 제 푸르른 녹음을 마음껏 되찾아 뽐냈다. 밝은 햇살과 물에 젖은 선명한 색채는 이질적이면서도 보기 좋게 어우러졌다. 그 모습은 아침의 일을 누그러뜨리진 못했지만, 적어도 잠시 잊을 수는 있게 해줬다.

    낯선 풍경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찰나, 현관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스케줄이 일찍 끝난 이들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츠메는 다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감상에 잠겨있던 모습을 보면 아마 그의 눈치를 보느라 분위기가 어색해질 게 뻔했다. 제가 차마 다 숨기지 못한 우울을 잡아채 귀찮게 구는 것은 제 룸메이트들로 족했다.

    "스승~ 스승~?"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나츠메를 찾으며 뛰어 들어온 소라였다. 소라는 벽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더니, 나츠메를 발견하고선 이윽고 쪼르르 달려왔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츠메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려 그를 환대했다.

    "어서와 소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던 걸까?"

    "Huhu~ 좋다면 좋은 일이네~? 스승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소라의 말에 나츠메는 고개를 기웃거리는 시늉을 했다. 네가 내게 무언가 묻는 건 드문 일은 아니지만 늘 기쁜 일이지. 그래, 오늘은 뭐가 궁금해서 왔을까? 따뜻한 목소리와 머리를 쓰다듬는 손에 기분이 좋은 듯 방긋 웃은 소라는 나츠메의 옆 소파에 앉더니 곧장 제 본론을 이야기했다.

    "스승, 혹시 '여우 씨'라고 알고 있나요?"

    "..'여우 씨'?"

    "유령을 불러내는 놀이의 하나인데, 동물의 영혼을 불러낸대서 '여우 씨'라고 한다네~? 시노부 쨩이 가르쳐 줬어요!"

    "아아, 콧쿠리(狐狗狸)를 말하는 거구나. 여우(狐, 키츠네)가 아니라. 잘 알지. 꽤 유명한 강령술이니까."

    "Hoho~ 그렇구나, 역시 스승이네~! 사실은 오늘, 여기서 다 같이 '콧쿠리 씨'를 하려고 했어요. 스승도 같이하지 않을래요? 분명 재밌을거라고 생각해요!"

    나츠메는 짐짓 망설였지만, 이윽고 소라에게 그러겠다 답했다. 유난히 제가 소라에게 약한 탓도 있었지만, 잔뜩 들떠 이야기하는 소라가 실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늘 그에게 배려받고 있었으니, 이런 순간만이라도 그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고 싶었다.
    나츠메가 승낙을 표하자 소라는 뒤늦게 공용 스페이스에 들어온 이들에게 달려가 그의 의사를 전했다. 안도와 기쁨의 시선이 반, 의외라는 시선이 반 섞여 나츠메를 향해 쏘아졌다. 나츠메는 예의 웃는 얼굴로 가볍게 그 시선을 무시하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차피 이런 사소한 반응이 그다지 중요하진 않았다.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신비주의적인 분위기가 있던 그에겐 그리 낯선 일도 아니었고.

    주술의 준비는 생각보다 더 빨리 진행됐다. '콧쿠리상'은 종이 위에 토리이가 그려져 있고 예와 아니오가 적힌 조금 특이한 오십음도표와, 10엔짜리 동전 하나만 있으면 되는 간단한 주술이었다. 애초에 준비물이 간단했으니 시간이 오래 걸릴 일도 없었다. 어느덧 준비가 모두 끝나고, 이 '놀이'를 위해 모여있던 이들은 들뜬 마음으로 정성스레 작성한 오십음도표가 놓인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주술인지, 그 결과가 어떤지 알고 있는 나츠메마저도 분위기에 휘말린 듯 기대가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여있던 이들 중 누군가가 이 상황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시노부에게 다음 순서를 묻자, 시노부는 기억을 되짚어보며 말하는 듯 더듬더듬 순서를 읊었다.

    "에, 그러니까, 이다음은 분명.. 여기 모두가 동전에 손을 얹고 '콧쿠리 씨'를 부르면 되오. 그러니까 그 주문이─"

    " '콧쿠리 씨, 콧쿠리 씨, 부디 와주세요. 만약 오셨다면 '네'로 가주세요.', 동전이 움직일 때까지 반복하면 돼."

    살짝 곤란해하던 시노부를 대신해 나츠메가 말을 끝맺었다. 구태여 자신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져 곤란에서 벗어난 시노부는 "오오, 정확하오. 역시 사카사키 공이오!" 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다른 이들도 눈을 반짝이며 하나둘 동전에 손을 모았다. 하지만 사람이 많으니 10엔짜리 동전 위에는 전부 손을 얹을 수 없어, 결국 나츠메를 포함한 세 사람이 시행하고 나머지는 뒤로 물러서 지켜보기로 했다. 인원이 정해지자 나츠메와 시노부가 번갈아 가며 주의사항을 설명했다. 동전에서 손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거나,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대부분 강령술에 있어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었다.


    ──그리고, 절대 장난으로 임해서는 아니 되오! 아무리 재미로 하는 거라지만, 엄연히 혼령을 부르는 것이니 말이오!

     

    사뭇 진지한 얼굴로 당부하는 시노부의 말이 돌연 나츠메의 폐부를 찔렀다. 나츠메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제게 하는 말은 아니었겠지만, 어쩐지 그들보다도 자신이 더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장난이라니, 말이 심하지 않나. 죽은 자를 대하는 일에 장난이 어디 있다고. 나츠메는 티가 안 날 정도로 동전 위에 얹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행여나 누군가 눈치챌까 일부러 더 웃는 얼굴을 보였다. 아침에 꾼 꿈 때문인지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팠다.

    "그럼, 시작할게. 콧쿠리 씨─"

    나츠메의 목소리를 필두로 몇 사람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어우러졌다. 그러자 일상적인 소리나 들뜬 이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운 게 보통이던 공용 스페이스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다들 동전의 향방에 집중하느라 말도 잊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그 '주문'이란 것에 다른 묘한 매력이라도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고요해진 가운데 몇 번 주문을 반복했을 때,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손을 올려놓다 못해 지그시 눌러 누군가 움직이지 못하게 해두었던 동전이 종이를 긁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움직였다. 그 모습에 동전에 손을 올려놓았던 세 명은 물론 뒤에서 구경하던 이들까지 표정을 굳혔다. 이윽고 천천히 움직이던 동전은 토리이 옆에 큼지막하게 적어놓은 '네'의 위까지 다다르고 멈췄다. 그 광경에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그래서.. 진짜 된 것이오?"

    "보면 모르겠어? 난 이런 걸로 장난은 안 쳐."

    정적 사이로 얼굴이 조금 창백해진 시노부가 나츠메를 보며 물었다. 막상 자신이 가져온 강령술이 성공한 것을 보자 무서워진 모양이었다. 겁은 많아가지고. 적당한 말로 안심시켜줄 수도 있었지만, 장난기가 발동한 나츠메는 일부러 더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고 받아쳤다. 나츠메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지레 겁을 먹은 시노부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다들 이 상황에 눈치만 볼 뿐 쉽사리 진행하지 못하자, 나츠메는 한숨을 쉬고 그들을 대신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사람입니까? 아니면 동물입니까?"

    동전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잠잠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방금이 우연이었던 걸까. 지켜보던 이들이 하나둘 성공에 의심을 품을 즈음, 그제야 '네'의 위에 머물러 있던 동전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움직이던 동전은 충분히 그 글자를 가리킨다고 인지할 수 있을 만큼 한 글자 한 글자에 머물렀다.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사람입니다. 대답을 확인한 나츠메는 다른 이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일부러 조금 위험한 질문을 해봤는데, 이 정도는 두루뭉술해서 괜찮나 보네. 딱히 이상한 느낌도 아니고. 뭐, 괜찮은 거 같아."

    안전을 보장해주는 듯한 나츠메의 말에 안심을 얻은 듯 다른 이들도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마치 거짓말탐지기의 성능을 시험하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질문으로 시작했다. 개중엔 애시당초 말도 안되는 질문도 있었고, 남을 놀리기 위한 의도가 다분한 장난스러운 질문이나 정말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질문도 있었다. 불러낸 '콧쿠리 씨'는 꽤 상냥한 령이기라도 한지 어떤 질문을 해도 유의미한 답이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반신반의했던 마음은 어느덧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다들 이 상황을 진짜라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질문을 거듭할수록 어딘가 유난히 이상한 점들이 눈에 띄었다. 다른 이들은 이 상황 자체에 정신이 팔려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츠메는 몇 가지 거슬리는 것을 느꼈다. 본래 그가 알고 있던 콧쿠리상은 과거보다는 미래에 대한 질문이 목적이었는데, 이 '콧쿠리 씨'는 미래나 불확실한 것에 가까울수록 애매모호한 대답이 많아졌다. 오히려 그들이 신통하다 느낄 만큼 선명한 답이 돌아온 것은 거의 그들만 아는 과거의 일들이었다. 성주관에서 벌어진 해프닝이라던가, 사무소 내의 정말 사소한 비밀이라던가, 뭐 그런 부류의 것들.
    특히 유난히 제 사무소에 대한 것들이 자세한 답으로 돌아왔다. 누가 보면 마치 직접 겪은 것처럼. 결국 첫 질문 이후 그저 다른 이들이 질문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던 나츠메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최대한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포장해 한참 만에 질문을 던졌다.

    " '콧쿠리 씨',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어?"

    한참 망설이듯 움직이지 않던 동전으로부터 끝내 돌아온 대답은 '네'. 그 대답에 나츠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틀어막았다. 돌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게 느껴졌다. 그럴 리 없다는 건 알지만, 아침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나츠메는 입술을 꾹 물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제가 예상하는 상황보다 단순히 저급령의 장난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적어도 이런 영적인 면에 있어서 그의 직감은 벗어나는 일이 드물었다.

    얼핏 시야에 들어온 소라가 나츠메의 분위기에서 무언가를 눈치챈 듯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애써 웃으며 소라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나츠메는 제 컨디션을 핑계로 둘러대 강령술을 끝내려 했다. 확실치도 않은 일로 소라를 걱정시킬 수는 없었다. 이럴 땐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더욱이, 알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의심은 의심으로만 두어야 한다는 경고성을 발했다. 결국 한계라고 느낀 나츠메가 입을 열려던 찰나,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동전이 멋대로 다시 움직였다.
    동전은 토리이의 위에서 멈췄다. 의문을 품은 이들이 다시 몇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동전은 더 움직이지 않았다. 뜻밖의 상황에 몇몇이 나츠메에게 시선을 던졌는데, 방금보다 더 굳은 얼굴로 동전을 바라보던 나츠메는 대답 대신에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내 말했다. 콧쿠리 씨, 콧쿠리 씨, 감사했습니다. 떠나주세요. 그러자 얼핏 손가락에 느껴지던 한기가 사라졌다. 나츠메는 깊게 숨을 내쉬며 동전에서 손을 뗐다. 그 자리의 모든 이가 직감적으로 강령술이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강령술이 끝나자마자 나츠메는 도망치듯 제 방으로 돌아왔다. 그 자리에 더 있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다른 사람들은 나츠메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이 주술의 여파라고 생각해 깊게 묻지 않고 그를 보내주었다. 아무도 없는 방으로 돌아온 나츠메는 문을 닫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제 몸을 가눌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몸을 짓눌렀다. 미래에 대해 물어보면 모른다고 답하는 이상한 부분에서 솔직한 령, 우리를 알고 있냐는 질문에 대한 '네'라는 대답, 자신의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지자 알아서 토리이로 돌아간 동전.
    나츠메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아닐거야, 아닐거라고. 그럴 수가 없어. 자꾸만 아침의 악몽이 겹쳐졌다. 그날 이후 점점 흐려지던 얼굴이 돌연 뇌리에 선명히 떠올랐다. 바보같이 헤실헤실 웃는 얼굴에 피투성이의 상냥한 웃음이 섞였다. 차디찬 바닥에 내팽겨쳐진 저를 끌어안던 그와 그의 품, 천에서 천을, 피부에서 피부를 타고 들어오는 선혈의 징그럽고 뜨거운 감각.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 어느덧 들려오는 사이렌, 두 사람을 갈라놓던 우악스러운 손길들. 나츠메는 몸을 움츠렸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마치 그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가장 사랑하던 이를 잃던, 지금으로부터 딱 일 년 전의 그날로. 그 당시에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던 그의 마지막 말들이 다시금 귓가를 때렸다. 움츠린 몸이 떨렸다. 눈물이 신음처럼 새어 나온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아무래도 오늘은, 유난히 힘든 하루임이 분명했다.




     

    나츠메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진 이후였다. 불이 꺼져 어둑한 기숙사 천장이 그를 맞이했다. 어떻게 침대까지 들어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 상태로 지쳐 잠든 것 같았다. 나츠메는 힘겹게 침대에서 빠져나와 더듬더듬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여전히 방에는 자신밖에 없었다. 스케줄이든 어떤 이유로든 원체 방에 잘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조금은 야속했다. 상냥한 나즈나든, 제멋대로인 레오든 누구라도 있었더라면 생각을 정리하기 편했을 텐데.
    불을 켜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려던 나츠메의 눈에 문득 선반에 놓인 오십음도표가 보였다. 아까 콧쿠리상을 하며 쓰던 것이 분명했다. 저게 왜 저기에? 문득 자신이 침대에서 깨어났다는 게 떠올랐다. 아무래도 자신의 상태를 걱정한 소라가 왔다 간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으면 차렸지, 얌전히 제 침대에서 눈을 뜨진 않았을 터였다. 그와 같은 아픔을 겪은 소라야 그가 왜 이런지 이해할 수 있다 쳐도, 다른 이들 눈에 아까의 제 상태는 문 앞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모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걱정시켰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네.

    나츠메는 오십음도표를 집어 들고 제 자리로 돌아왔다. 멍하니 종이를 들여다본다고 무언가 해답이 나올 리가 없지만, 자꾸만 아까의 일이 생각나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손을 뻗어 토리이를 쓸자 연하게 색연필이 묻어나왔다. 손에 묻은 붉은 자국이 옅은 핏자국 같았다. 어두운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보던 나츠메는 제 침대 옆 선반에 종이를 내려다 놓고 어디선가 동전을 가져와 앉았다. 헛웃음이 났다. 이런 류의 주술을 다시 시도한다 해서 똑같은 령이 불러와질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더욱이 이건, 절대로 혼자 해서는 안 되는 주술이다. 그걸 뻔히 알고 있는 자신이 금기를 어기면서까지 무언가에 매달린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츠메는 내심 알고 있었다. 그가 지금 찾을 수 있는 해답은, 이것뿐이었다. 결국 나츠메는 다시금 주문을 입에 담았다.

    콧쿠리 씨, 콧쿠리 씨, 부디 와주세요─

     

    이번엔 아까보다 반응이 빨랐다. 그가 말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전은 미끄러지듯 '네'의 위로 향했다. 그 모습에 나츠메는 한참이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그의 감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잠시 말을 고르던 나츠메는 비릿하게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콧쿠리 씨'에게 물었다.

    "날 알지? 그것도 아주 잘."

    무응답. 나츠메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지금 이 ‘놀이’에 응한 것이 정말 그라면 예민한 질문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던 대답은 망설이듯 천천히 그의 이름 세 글자를 가리켰다. 나츠메 군, 메시지 위에 목소리가 겹쳐져 들리는 착각이 들었다. 나츠메는 실성한 듯 웃었다. 웃는 사이로 기어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니, 알고 있었다. 여기서 더 물어서는 안 된다. 분명 이 이상 나아가면 자신이 또다시 상처받고 만다. 하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 여기서 멈췄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이 기회마저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나츠메는 동전에 얹은 반대편 손을 꾹 쥐고서 다시 질문을 이어 나갔다.

    "왜..."

    정확히는, 이어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더는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어느 하나 쉬이 알 수 없었다. 분명 전할 수만 있다면 전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었는데, 입을 열려니 그들 중 아무것도 꺼낼 수 없었다. 바싹 마른 입술만을 달싹이는 나츠메를 보고 마치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하다는 듯이, '콧쿠리 씨'는 아까처럼 질문을 넘어 제멋대로 움직여 그에게 말을 건넸다.

    「울지 마」

    「네 탓이 아니에요」

    "...그때랑 똑같은 말을 하네."

    나츠메는 힘없이 말했다. 허무한 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한 글자씩 문자로 천천히 짚어주는 말을 완성하고 나서야 그날 그가 죽어가면서 자신에게 무엇을 전했었는지 떠올려냈다. 피를 뒤집어쓰고도 평소와 다를 바 없던 그 상냥한 미소가 무슨 말을 했었던가. 떠올릴수록 잔혹한 부탁이었고, 지금도 그랬다. 당신을 잃고,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 잠시 망설이던 나츠메는 자신이 그를 부르던 말들 중 가장 아끼고 아꼈던 말을 꺼내 들었다. 이젠 무덤 앞이 아닌 이상 다시는 부를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말이었다.

    "츠무기, 오빠."

    당연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와 ‘이어져’ 있다 해서, 그의 말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말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그 사실이 새삼스레 피부에 와닿자, 한기가 느껴지는 손보다도 가슴이 더 시리게 느껴졌다. 지독한 외로움 사이로 문득, 자신이 콧쿠리상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떠올랐다. 이것 또한 생전 그가 알려준 것이었다. 그땐 한낱 어린아이 장난 같은 얕은 오컬트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데다가, 구태여 그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만큼 유명한 강령술이었기에 대충 반응만 해주고 넘겨버렸었다. 우스웠다. 이제와서 이런 상황이 되어버리면, 마치 그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알려주기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맞지? 대답해줘."

    결국 나츠메는 금기를 넘어 억지를 부렸다. 그의 손으로 직접 확신을 받고 싶었다. 이 뒤가 어떻게 되더라도, 어떤 상처를 받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당장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답이 없던 동전은 나츠메가 몇 번이나 대답을 재촉하고서야 느리게 '네'로 향했다. 나츠메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차라리 낮부터 지금까지 이 모든 게 그저 저급령의 장난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차마 이 모든 상황을 그렇게 치부해 버릴 수 없었다. 그 사실에서 비롯된 비참함이 폐부를 찔렀다.

    "..이렇게 나타난 이유가 뭐야? 뒤늦게 놀리기라도 하고 싶었어?"

    그 사이에 곱게 나가지 않는 건 말이었다. 만족하는 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화풀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실컷 비꼬는 말을 내뱉자 잠시 후련한 것도 같더니 머지않아 후회가 뒤섞여 더욱 그를 옥죄었다. 한참이나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지 종이 위를 미세하게 오가던 동전이 끝내 '아니오'로 옮겨가자 이조차 거슬려 견딜 수 없었다. 변명조차 하지 못하던 과거의 그가 여실 없이 떠올랐다. 결국 나츠메는 후회할 걸 알면서도 한마디 더 내뱉었다.

    "줄곧 곁에 있었어? 그럼 이번에도 조용히 있지 그랬어. 그러면 적어도 선배 때문에 상처받을 일은 더 없었을 텐데."

    동전이 다시 움직였다. 나츠메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런 제지나 외면 없이 그 광경을 잠자코 지켜봤다. 자신이 무슨 말을 바라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몰랐지만, 동전을 따라가는 시선에는 방향을 모를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미안해요」

    그가 전한 메시지는 간결했다. 조금 더 기다려봐도 그 이상의 답은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는 의사를 다 전하지 못해 말을 아끼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 말 이외에 할 말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지금 현명한 답은 아니었다. 결국 나츠메는 지난 일 년 동안 억눌러왔던 것이 폭발한 듯 악을 쓰며 외쳤다.

    "..미안해? 미안하긴 한가 보지? 아 그래, 나는 선배가 그렇게 눈치가 좋은 사람인 줄은 몰랐네."

    설령 그것이 진심이 아닐지언정, 그가 언어를 내세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은 이제 분노뿐이었다. 그마저 없다면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고스란히 느껴지자 나츠메는 이를 악물었다. 으득, 분에 겨워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충동적으로 손을 떼지 않으려 애쓰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행여나 손을 뗐다가 연결이 끊어지기라도 할까 불안했다. 결국 한 번 터져 나온 감정은 막을 새도 없이 계속 진심에 가시를 세워 흘러나왔다.

    "그렇게 나를 걱정했으면, 한 번쯤은 다른 방법으로 모습을 드러내 주지 그랬어? 스토커같이 소름 돋게 옆에 맴돌기만 하지 말고!"

    말투가 격앙될수록 호흡이 거칠어졌다. 얼굴이 일그러지자 고여있던 눈물이 거칠게 뚝뚝 떨어졌다. 동전에 올려놓은 손에 과하게 힘이 들어가 동전을 내리눌렀다. 무언가 답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감정에 그가 변명할 여지조차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 끝에 남는 게 서로를 지독히 미워하게 되는 것뿐이라도, 차라리 그런 결말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럼 차라리 이렇게까지 괴롭진 않겠지. 결국 나츠메는 가장 극단적인 방향으로 비집고 나아간 제 결론을 고했다. 담담한 목소리와는 달리, 표정은 공허감에 괴로워 보였다.

    "선배가 정말 나한테 미안하다면, 말리지 마. 내가 뭘 하든, 어떻게 되든 간에."

    그리고 동전 위에 올려놓은 손을 떼려 팔에 힘을 줬다. 강령술을 제대로 끝내지 않고 중간에 그만둬버리면 돌려보내지 못한 령에 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어찌 되든 좋았다. 아니, 오히려 상대가 그라면 저주받고 씌어버리는 편이 훨씬 나았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끊어낼 수 없이 깊게 얽혀버린다면 적어도 다시 그를 떠나보낼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 해서 다시 닿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건 오늘 이전의 일 년과 다를 바 없었다. 어찌 됐든 이어져 있을 수 있다면 그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앞으로의 나날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더라도 이전보다 나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나츠메는 그럴 수 없었다. 아까보다 훨씬 짙은 한기가 제 손을 강하게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기껏 힘을 줬던 손은 끝내 올라가지 않았다. 나츠메의 표정이 변했다. 방금 전까지는 스스로를 깎아가며 힘껏 그를 조롱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지금 나츠메의 얼굴은 그럴 여지조차 없을 만큼 정말로 상처받은 모습이었다. 일 년 전, 가장 소중했던 이를 잃던 그 순간 그가 지었던 얼굴처럼.

    "..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그래선 안 된다는 듯이, 그러지 말라는 듯이 나츠메의 손을 지그시 누르는 게 전부였다. 그 한기가 지독하게 상냥해 더욱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잊고 있던 그가 있던 시간의 감각이 기억 너머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왜, 왜?! 단 한 번도 내게 도움이 된 적이 없어?! 이미 멋대로 죽어버린 주제에, 마지막 부탁 하나 못 들어줘?"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린 나츠메가 결국 다시 소리를 질렀다. 격해진 감정에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가 마치 절규처럼 들렸다. 한기에 짓눌린 손이 결국 감정을 참지 못하고 종이를 구기듯 쥐었다. 밀려오는 비참함이 그를 집어삼켰다. 나츠메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더 추한 꼴을 보일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사라지라고 축객령이라도 내리고 싶었지만, 어떻게 이어진 연이 다시 영원히 끊어져 버릴까 덜컥 무서워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마음을 안다는 듯 나츠메의 손을 짓누르기만 하던 한기가 그의 손가락을 톡톡 쳤다. 감정에 휩쓸려 어지러울 정도로 거칠어진 숨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던 나츠메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엔 제 손아귀에 눌려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동전과 구겨진 종이가 보였다. 나츠메가 멍하니 제 손을 보고만 있자, 다시금 그의 손을 두드리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어쩐지 할 말이 있다고 전하는 것 같았다. 나츠메는 저도 모르게 손에서 힘을 뺐다. 붙잡던 힘이 사라지자 동전은 다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행복해져요」

    「약속은 꼭 지킬게요」

     

    그 말에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직 그들이 어린아이일 적이던, 까마득히 먼 옛날의 일. 밤하늘 아래 울먹이는 자신을 달래주고 있는 그가 여전히 눈에 선했다. 엉망으로 묶인 머리와 웃으며 내미는 새끼손가락, 이젠 둘 중 누구도 지킬 수 없게 되어버린─ 함께 행복해지자던 약속. 나츠메는 다시금 울컥 화가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아니, 싫어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이건 그가 건네는 마지막 위로이자 작별 인사였다. 아마 자신이 알고 있는 그는 곁에 있더라도 다시 이런 부름에 응하는 일따위 없을 테니, 지금이 정말 마지막인 셈이었다.
    말을 끝낸 동전은 아까처럼 천천히 토리이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잠잠해졌다. 마치 나츠메의 작별로 이 만남을 끝내기를 기다리듯이. 생기라곤 하나도 없는 눈으로 동전 너머에 있을 그를 바라보던 나츠메는 입을 달싹이다 이내 그만뒀다. 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뻔히 아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가.. 이제 됐어."

    결국 나츠메가 할 수 있는 건 자존심에 그를 밀어내는 것뿐이었다.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조금만 덜 상처받았더라면 더 나은 말로 그를 보내줄 수도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만약의 일이었다. 나츠메는 시선을 돌렸다. 더 보고 있으면 미련만 남을 것 같았다. 그 억지스러운 외면에 그는 마지막까지 머뭇거리듯 제 손을 지그시 눌렀다. 그 한기가 사라지기 직전, 온몸에 오싹 오한이 들었다. 놀란 나츠메가 고개를 들었지만 더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사이 피부를 찌르는 고독감이 정말 끝이라고 알리는 것만 같았다.
    차츰 현실감이 돌아오자 후회가 밀려왔다. 감정에 뒤로 밀어두었던 하고 싶은 말이 하나씩 떠올랐다. 동전에 얹어두었던 손에서 힘이 빠져 느슨해지더니, 둔탁한 소리와 함께 책상에 떨어졌다. 여태 한두 방울씩 흐르던 눈물이 기어코 울음이 되어 흘러내렸다. 소리를 죽여 울던 것은 어느덧 어린아이 같은 울음으로 변했다. 나츠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무력하게 울었다. 이미 연결이 끊어졌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동전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은 채로. 울음 사이 연신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동전이 움직이길 바랐다. 후회 사이로 원망이 비집고 올라왔다. 우연이겠지만, 그가 의도했을 리도 없겠지만 그래서 더더욱 참 짓궂게만 느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일 년 전의 작별을 재현할 필요는 없었는데.

     

     

     

     

    이른 새벽, 나츠메는 한 도로를 찾았다.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사고 이후 단 한 번도 오지 않은 곳이었다. 행여나 멀리서라도 이곳을 보기라도 하면 구역질이 날 듯 속이 뒤집히고 어지러워 의식적으로 피하던 곳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그랬고. 오늘이 지난 이후에도 다시 이곳을 밟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가 가려는 곳은 일 년 전, 아오바 츠무기를 잃었던 곳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행복했던 날이 끝난 곳. 주변을 둘러보며 눈에 담을수록 도망쳐버리고 싶었지만, 그는 그 모든 걸 참아가면서 사고가 났던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밖에 없었다. 이 의식을 ─이 관계를─ 끝내기 가장 적절한 건 여기뿐이었다. 그의 직감이 그렇게 확신했고, 밤새 잠들지 못하던 그는 결국 하늘이 밝자마자 밖을 나서 지금에 이르렀다.

    새벽의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고요했다. 차 하나 지나가지 않는 도로를 따라 걷던 나츠메는 그 고요함이 마치 어제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걸을수록 그가 생각나 숨이 막혔다. 그날 그 길을 걸으며 그를 마주했던 순간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나자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떠오르는 생각을 막지는 않았다. 못다 한 작별을 전하러 가는 길마저 그러고 싶진 않았다. 미련한 짓이지. 그렇게 생각하자 한숨 사이로 실없는 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그렇게 30분쯤 걸었을까, 풍경이 바뀜에 따라 서서히 걸음을 늦추던 나츠메가 완전히 멈춰 섰다. 이쯤이었나. 주변을 쭉 둘러보고 확신을 가진 나츠메는 발치의 보도블록을 눈으로 더듬어가며 정확한 장소를 찾았다. 재포장으로 서둘러 덮어버린 차도와 달리 아직 인도는 스며들어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대부분 그의 것이겠지만, 제 것도 섞여 있을지 모르는 검붉은 흔적. 어쩐지 그때 아스팔트에 쓸려 까졌던 곳이 따가운 것도 같았다. 괜히 소름이 돋은 그는 팔짱을 낀 채 팔을 쓸며 핏자국 앞에 섰다.

    나츠메는 제 품에서 어제 사용했던 오십음도표를 꺼냈다. 챙길 때 반으로 접었던 종이를 피자 어제 제가 구겼던 자국이 드문드문 눈에 보였다. 살짝 미련이 남은 눈으로 그 자국을 쫓던 그는 품에서 물건 하나를 더 꺼냈다. 작은 오일라이터였다. 주술용으로 쓰던 것이라 도심의 풍경에는 꽤 이질적인 고풍스러운 물건이었지만, ES에 들리지 않고 바로 가져올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어차피 끝맺음을 위해 온 것으로 생각하면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라이터 뚜껑을 열어 불을 붙이자 탁 불꽃이 튀었다. 점화된 불꽃은 차갑고 어두운 새벽과는 달리 더없이 따스해 보였다. 나츠메는 멍하니 불꽃을 바라봤다. 작은 망설임이 남아있었다. 제 손에 들린 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종잇조각일 뿐인데, 그저 하루의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불을 켜두기만 하자 몸체가 열기에 점점 데워졌다. 결국 나츠메는 그 열기를 느끼며 라이터를 꾹 쥐고 있더니, 더는 뜨거워 들고 있기 어렵다 느낄 즈음이 되어서야 반대쪽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불길에 가져다 댔다. 불은 금세 옮겨붙었다.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불꽃은 마치 종이를 갉아 먹는 것처럼 보였다.

    종이가 전부 타들어 가자 나츠메는 들고 있던 손에서 종이를 놓았다. 제 손에 쥐여 있던 만큼만 남은 종잇조각은 땅에 떨어져 재가 되고서야 불이 꺼졌다. 발치에 흩어진 잿더미는 바람이 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이윽고 나츠메는 함께 챙겨온 동전을 꺼내 힘껏 던졌다. 본래라면 주변 신사나 다른 곳을 찾아 공양할 생각이었지만, 몇 번을 생각해봐도 이게 최선이었다. 동전은 몇 번 튕기더니 도로 사이 화단에 닿아 더는 구르지 않았다. 아마 이대로면 회수되는 일도, 바퀴나 발에 짓밟힐 일도 없을 거였다.

    ‘...안녕.’

    이를 확인하고서야 나츠메의 표정이 비로소 일그러졌다. 휘두른 팔의 반동에 뒤로 한걸음 물러선 그는 속으로 작별을 고하며 눈물을 터뜨렸다. 실컷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울 일이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흐르는 눈물 사이 보이는 하늘이 아까보다 밝아 있었다.
    그 뒤로 한참 더 텅 빈 풍경을 눈에 담던 나츠메는 도로에 지나가는 차가 한두 대씩 보일 때가 되어서야 발길을 돌렸다. 그가 있던 곳의 잿더미는 어느덧 지나가는 차에 흩날려 흔적도 남지 않은 채였다.

     

     

     

     

    𝒻𝒾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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